2018년 10월 6일
사도행전 15장
*말씀읽기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23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25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26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7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28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29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0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31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32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33 (없음)
34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35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6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7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8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39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0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말씀묵상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 여행은 많은 이방인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좀 석연찮은 마음이 일기 시작했는데 바로 율법적인 내용들에 대한 포기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하나님 백성됨, 구원받음이 더 나은 것이고 정상적인 것이고 옳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것을 교회가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있던 안디옥교회에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고 이에 몇 사람들을 보내어 예루살렘 교회에서 결정하게 됩니다. 그 내용이 20절입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삶에 자신도 모르게 익숙해 있었던 모습들인데 이제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된 자들로서 어느 정도의 한계를 그어준 것입니다.
이 네 가지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분명 금하도록 제한한 것은 당시의 이방사람들의 제사의식으로 인해 생기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기지 않다 하더라도 먹는 습관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결을 하는 과정에서 언급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제시했던 모세의 율법을 따라야 한다는 점을 전혀 말하지 않은 점입니다.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전혀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들의 결정 내용을 보면 이것은 권고 사항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구원을 얻고 그렇게 해야 교회에 나올 수 있다는 조건이 아닙니다. 편지를 보내며 문안하는 내용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을 위시한 유대인들이 주장한 할례는 구원의 조건으로 이들이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회의의 결론으로 주어진 내용에 할례는 당연히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할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너무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할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됨의 증거였고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됨의 표였습니다. 그것이 없는 것은 위의 내용에서 제외된 자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됨이 은혜로 주어지게 되자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조건이 무용지물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던 것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가 더해진 것으로 생각했는데 할례 없이도 하나님의 백성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너희들도 할례를 해야 구원이 온전해지는 것으로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갖게 된 것도 당연히 할례를 오해한 것입니다. 할례는 표로 주어진 것이지만 그 의미는 조건이 아닌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권적으로 이루어내신다는 증거로 명하셨던 것입니다. 즉 할례를 명하심으로 이후에 이루어지는 것은 너의 능력이 아닌 내가 이루어 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삭을 낳기 전에 할례를 명하셨고 가나안을 들어와서 여리고성을 앞두고 할례를 명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던 것입니다. 할례를 행함으로 너의 모든 삶, 계획, 생애, 결과가 다 하나님의 것이며 그의 뜻을 성취하는 자임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의 뜻대로 인도하소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이 성취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증명된 상황에서 할례를 행하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을 부인하는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십자가는 할례를 통한 증거를 온전히 이루어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 이루셨군요 하는 고백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신자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은혜를 고백하는 증거일 수는 있어도 은혜를 갚는 수단일 수는 없습니다. 은혜는 갚는 것이 아니라 고백하며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엎드리며 자신의 무익함과 무능함과 죄악됨을 드러내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짐지우지 말라고 합니다. 은혜 앞에서는 짐이 아니라 기쁨과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이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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