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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5장

2018년 10월 20일

사도행전 25장



*말씀읽기

1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2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3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4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5 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


6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7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8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9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10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13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17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18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20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2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24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26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27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말씀묵상

바울을 이렇게도 집요하게 죽이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렇게까지 죽이고 싶을까, 이미 가이사에게 항소하며 자신들의 손을 떠났으면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벨릭스 총독이 그만 두고 베스도라는 사람이 총독이 되어 부임 순시로 예루살렘을 갔는데 대제사장들과 고위 유대인들이 다시 바울을 고소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재판하기를 부탁합니다. 그를 도중에 죽이려고 계획한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가이사랴에서 재판을 하지만 유대인들은 바울의 유죄를 증명하지 못하고 바울은 가이사에게 상소하게 됩니다. 며칠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를 문안차 찾아왔을 때 바울에 대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해 도움을 요청하였고 그래서 바울이 이들 앞에서 자기를 변명하는 내용이 26장에 서술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저자는 무엇을 보여주려는 것일까요? 단순한 사건 나열이 아닐 것입니다. 성경은 역사 이야기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선 중요한 점은 복음의 전파입니다. 내용이 전달된다는 의미도 있지만 복음이 사람들 사이에서 증거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믿는 자들이 세상에, 불신의 상황에 존재하는 아주 중요한 의미입니다.

신자들은 세상 속에서 복음을 소유한 자로 있습니다. 그것을 증거 하든지 혹은 증거 하지 않든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자들이 무엇을 소유하고 삶의 근거를 삼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주변을 잘 살펴보면 그와 접촉하는 자들에게 바울이 누구인지, 왜 지금 이러한 상황에 있게 되었는지가 드러나는데 그것이 다 복음으로 말미암았음을 듣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21장에서 예루살렘에 와서 잡히게 되는데 소란이 일어 천부장이 결박하여 잡아가는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23장에서는 공회 앞에서, 24장에서는 벨릭스 총독 앞에서, 25장에서는 새총독 베스도 앞에서, 26장에서는 아그립바왕과 버니게 앞에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즉 바울이 어떤 자인지, 무엇 때문에 그가 그러한 부당한 대우를 받는지, 확인하게 됩니다. 물론 듣는 자들은 바울이 그저 불쌍한 자로 여겨질 뿐입니다. 왜 저러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로 인하여 이들은 복음을 듣게 되고 증거로 남게 되는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세상에서의 진정한 존재의미입니다. 물론 복음을 전할 수도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러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꼭 전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누구인가만 드러나도 됩니다. 믿는 자, 하나님의 백성, 하늘의 소망을 가진 자, 영생을 소유한 자로 있는 것입니다. 좀더 적극적인 면으로는 이 세상의 기준과 가치가 나를 이끌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는 일이 잘되었다고 그것으로 들레지 않으며 반대로 계획한 일이 잘 되지 않거나 망하더라도 실망하고 좌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하나 사건이 말해주는 중요한 사실은 세상은 복음에 대해 항상 적대시한다는 사실입니다. 결코 호의적이 아닙니다. 관심을 갖다가도 멀리합니다. 24:24에서 벨릭스가 그랬습니다. 호감도 돈 때문입니다(26절). 아니면 자리를 위해서입니다(25:9). 그러나 이러한 적대적인 환경이 있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의 계획은 성취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을 향한 암살 계획들이 진행되지만 기회가 순순히 제공되지 않습니다. 지도자들이 동원되고 합작을 하려고 하지만 만만하지가 않습니다. 바울이 무슨 수를 쓰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오히려 바울이 보호를 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물론 특별한 모습이지만 이러한 바울의 모습도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하심을 이루시는 방법입니다. 바울은 로마로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호받아야 했고 위협으로부터 지켜져야 했던 것입니다. 세상이 적대적이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성취되어야 합니다. 이 사실과 믿음이 세상에서의 삶을 감당하도록 합니다. 좋다 나쁘다, 잘된다 안된다라는 평가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지금 바울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이 이러한 형통의 과정임을 고백하는 삶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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