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읽기]
1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다윗의 노래> a)어리석은 사람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구나. 모두가 하나같이 썩어서 더러우니,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a. 시편에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나발은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자를 가리킴)
2 주께서는 하늘에서 사람을 굽어보시면서,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보신다.
3 모두들 다른 길로 빗나가서 하나같이 썩었으니,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한 자냐? 그들이 밥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나 주를 부르지 않는구나.
5 하나님이 의인의 편이시니, 행악자가 두려워하고 또 두려워한다.
6 행악자는 가난한 사람의 계획을 늘 좌절시키지만, 주님은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신다.
7 하나님, 시온에서 나오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십시오! 주께서 당신의 백성을 그들의 땅으로 되돌려 보내실 때에, 야곱은 기뻐하고, 이스라엘은 즐거워할 것이다.
[말씀묵상]
14편은 어리석은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드러내는 시입니다. 이들의 성격이나 행실이 어떠한지를 시인이 표현하고 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이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전제로 말미암은 것임을 밝힙니다. 이 무신론적인 생각은 단순히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상관없이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시인은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분명 세상에서 뛰어난 사람이며 능력있는 사람들로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자, 하나님 없이 사는 자, 그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 그래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에 대해 죄인, 악인, 어리석은 자로 말합니다. 결국 이들의 삶에서는 부패와 가증한 행실, 의인을 위협하는 모습들이 드러납니다. 치우쳐 선을 행함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어리석은 자를 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찾는가 아닌가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며 예배하고 언약 안에 살고 있는 자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이러한 환경과 자세를 갖지 않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자들이 죄악을 행하는 것으로 단정합니다. 또한 이들이 무지한 자들이냐는 질문을 합니다. 즉 무지한 자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정신적 결함이나 지적인 부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모습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심을 믿습니까? 하나님을 중심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리석은 자의 모습이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 중심적이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딛1:16절에 이런 지적이 나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말과 머리로는 하나님을 시인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무신론자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을 의지하고 자기 만족과 목적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무시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자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나발입니다. 삼상 25장에 나오는 나발이라는 사람이 바로 이 단어입니다. 그는 다윗을 무시하여 죽을 뻔했다가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에 의해 살아난 자입니다. 그의 모습이 바로 오늘 시의 내용과 같음을 보게 됩니다. 양털을 깎는 잔치에 다윗이 청년들을 보내 나발의 호의를 청했지만 다윗이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며 빈손으로 돌려 보냈던 것입니다. 그동안 다윗의 무리들에 의해 보호받았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선을 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어리석은 자(나발)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신자들도 범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 그의 주인되심을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아가 무시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과 생각으로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지는 않더라도 삶의 현실 속에서는 없는 것과 방불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리석은 자의 특징인 조건과 상황에 삶을 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것들이고 영원하지 않은 것들입니다. 이것을 의지하는 자는 늘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생명이 없고 결국 없어지고야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시고 여호와께서 가난한 자(악인의 공격대상)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합니다. 신자들의 삶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도 도우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에 있지만 이것이 방패막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실제는 무섭고 불안한데 하나님이 계시니까 괜찮아 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위로를 받음으로 없어지는 모습이 아니라, 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들이고 지금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기에,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심대로 이끌려 살고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우심은 상황이 변하는 나아짐이나 어려움을 물리치는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구나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고백을 확인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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