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읽기]
1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2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3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 지 오랜 자 같이 나를 암흑 속에 두었나이다
4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5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6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
7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
8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9 여호와여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건지소서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나이다
10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11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
12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말씀묵상]
143편을 보면 시인은 아주 깊은 수렁에 빠진 것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겨졌고(2절), 죽은 자처럼 어둠 속에서 있고, 속이 참담한 지경에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있다면 그야말로 인생의 가장 처참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시편의 내용이 그렇듯이 시인의 상황으로 인하여 결국은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1절에서 여호와를 부르며 간구하는 시인의 간절함을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간구가 나의 소원을 아뢰는 것이 아니라 주의 진실과 의를 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실과 의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진실하심, 의로우심은 죄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요일 1:9절에서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미쁘시다는 말이 진실하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자칫하면 '내 소원 이루기'가 되기 쉽습니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기도를 한다는 자체가 그분께 의지한다는 자세이고, 그렇다면 그분의 뜻과 인도하심만을 바라는 것이 진정한 기도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의 진실과 의로 응답하시길 바라는 것은 기도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계속해서 간구하는 내용도 결국은 주의 뜻, 계획, 언약에 따라 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5절에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세 문장이지만 같은 내용입니다. 주께서 행하셨던 일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의 행하신 것이 무엇일까요? 시인이 다윗으로 본다면 왕으로 세우신 것, 후손에 대한 약속이 있을 것입니다. 누구를 생각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하시고 이끄시고 함께 하신 내용일 것입니다. 지금의 신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구원하시고 약속하시고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간구할 수 있는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기억하고 있는 주님의 행하시고 약속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나를 구원하심인가요?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심인가요? 다시 오심인가요? 그렇다면 그러한 것들이 여러분들을 평안하게 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시인의 상황처럼 처참한 상황을 넘어서게 하는 요인으로 자리잡고 있는지 말입니다. 늘 그렇지만 다시 현실을 바라보면 답답함과 불안함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의 현실을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인도 계속해서 간구합니다.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한다고 합니다. 없어지지 않는 시인의 답답함입니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뭔가 열심히 하면 될까요? 예배? 봉사? 찬양? 선교? 맡은 책임을 열심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내가 해결하려는 모습입니다. 간구하는 것은 의지함인데 열심으로 하려는 것은 여전히 내가 해결하려는 의도가 있는 모습입니다. 주 앞에 의로운 인생이 없다는 시인의 고백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향방을 주님께 의탁하고 있습니다. 뭐를 하겠다는 시도가 없습니다. 오직 의뢰하고, 내 영혼을 주께 드리고, 주께 피하여 숨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단기간에 잠깐 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의 모든 삶이 그러했던 것입니다.
세상은 신자들로 하여금 주만 의지하고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래? 하는 것으로 공격합니다. 그러나 공격으로 인해 죽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지 않음으로 죽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달라는 간구를 합니다. 신자의 삶은 주의 이름을 위해 존재한다는 고백입니다. 주의 이름을 위해서라는 말은 주님의 약속이 나를 통해 성취된다는 말입니다. 신자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주의 이름을 위해 살려 놓으신 것입니다. 이를 방해하는 세상은 심판으로 멸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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