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읽기]
1 <성전 봉헌가, 다윗의 시> 주님, 주께서 나를 건져 주시고, 내 원수가 나를 비웃지 못하게 해주셨으니, 내가 주님을 우러러 찬양하렵니다.
2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께 울부짖었더니, 주께서 나를 고쳐 주셨습니다.
3 주님, 스올에서 이 몸을 끌어올리시고, 무덤으로 내려간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살려 주셨습니다.
4 주님을 믿는 성도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여라.
5 진노는 잠깐이요, 은총은 영원하니, 저녁에는 눈물이 흘려도, 아침이면 기쁨이 넘친다.
6 내가 편히 지낼 때에는 "이제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겠지" 하였지만,
7 아, 태산보다 더 든든하게 은총으로 나를 지켜 주시던 주께서 나를 외면하시자마자 나는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8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었고, 주님께 은혜를 간구하였습니다.
9 내가 죽은들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나를 무덤으로 보내 놓고, 주께서 얻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한 줌의 티끌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한 줌의 흙이 주의 진리를 전파할 수 있습니까?
10 주님,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 주십시오.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주께서 나를 돕는 분이 되어 주십시오.
11 주께서는 내 슬픔의 노래를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나에게서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을 갈아입히셨기에
12 내 영혼이 잠잠할 수 없어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영원토록 주께 감사를 드리렵니다.
[말씀묵상]
본 시는 저자가 큰 아픔, 혹은 절망적인 상황을 경험한 후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시입니다. 2-3절을 볼 때 죽음 같은 아픔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죽음 같은 고통을 경험한 것이 자신의 교만함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6절을 보면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고 고백했었다는 것입니다. 죄인된 인간들이 늘 빠지는 함정이며 실수들입니다.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 반복합니다. 세상의 기준에 의해 자신의 형편을 판단하며 그것을 인생의 목표를 삼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의 상황은 마치 다윗이 형통할 때 인구조사를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자가 다윗이라면 이 상황을 두고 지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삼하 24장을 보면 다윗이 인구조사를 명하는데 이 때 군사령관 요압이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백배라도 더하게 하여 보게 하실 분이신데 왜 수를 헤아리고자 하시느냐'고 반대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형통과 강성함을 수로 증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에 대해 요압은 교만함이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형통함에 대해 자신의 능력임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신자들의 경우에 하나님을 잊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된 것, 열심을 다해 맺어낸 결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만들어서 드러내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7절에서 시인은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주의 은혜로 나를 산같이 굳게 세우신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당연한 고백임에도 불구하고 잘 하지 못합니다.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며 인도하심임을 믿으면서 결정적일 때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주께서 얼굴을 가리심으로 근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얼굴을 가리셨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음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고백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주의 은혜였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형통할 때가 아닌 근심하며 죽음같은 아픔을 경험할 때에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목표하고 바라며 살고 있는지,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있는지, 주의 은혜를 구하며 살고 있는지, 세상의 기준에 따라 목적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늘 살펴야 할 것입니다. 10절에 시인은 분명하게 간구합니다.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라고 합니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들임을 기억하시고 오늘도 주를 바라며 사명을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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