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6장
- 주언약교회
- 2021년 9월 15일
- 3분 분량
2021년 9월 15일
히브리서 6장
[말씀읽기]
1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제쳐 놓고,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2 세례의 교리와 안수와 죽은 사람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과 관련해서, 또다시 기초학습을 닦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권능을 경험한 사람들은,
6 타락하면, 그들을 다시 새롭게 해서 회개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박고,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7 땅이 자주 내리는 비를 빨아들여서, 농사짓는 사람에게 유익한 농작물을 내주면, 그 땅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습니다.
8 그러나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면, 그 땅은 쓸모가 없어지고, 저주를 받아서, 마침내는 불에 타고 말 것입니다.
9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말하지만, 여러분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더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10 하나님께서는 불의하신 분이 아니시므로, 여러분의 행위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을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성도들을 섬겼으며, 또 지금도 섬기고 있습니다.
11 우리는, 여러분 각 사람이 같은 열성을 끝까지 나타내어서, 소망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12 여러분은,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믿음과 인내로 약속을 상속받는 사람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
13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당신보다 더 큰 분이 계시지 않으므로, 당신 스스로를 두고서 맹세하여
14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너를 번성하게 하겠다" 하셨습니다.
15 아브라함은 오래 참은 끝에, 그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위대한 이를 두고서 맹세합니다. 그런데 맹세는 그들에게 모든 논쟁을 그치게 하여 주고, 확정을 지어 줍니다.
17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상속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불변함을 더욱 밝게 나타내 보이시려고, 맹세로써 보증해 주셨습니다.
18 이는,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으려고, 세상에서 피신한 사람들인 우리가 이 두 가지 변할 수 없는 사실, 곧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의지하여, 큰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맹세하실 때에,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19 우리에게는 이 소망이 있으니, 그것은 안전하고, 확실한 영혼의 닻과 같아서,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줍니다.
20 예수께서는 앞서서 달려가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거기에 들어가셔서,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말씀묵상]
6장에서는 신자들의 자리와 가치가 어떤 자들인지를 설명합니다. 젖을 먹는 자들이 아니라 이제는 장성한 자로서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1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가 무엇입니까? 1-2절에 나열한 내용들입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함, 하나님께 대한 신앙, 세례들, 안수, 죽은 자의 부활,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믿음의 내용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들을 당시 기독교 교리의 기초로서 가르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입니까? 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독자들의 상황은 고난과 핍박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종교적으로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내용만 지키면 된다는 식의 연약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성숙한 믿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5장 마지막 절에서 언급하듯이 장성한 자로서,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점진적인 성장을 해 나가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완성된 구원과 승리를 소유한 자가 되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초보를 계속 닦고 있을 어린 아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이 갖는 자리와 가치를 말해 줍니다. 초보에 머물러 있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구원의 완성을 맛보고 소유하고 있는 장성한 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4-6절에 특별한 경고를 주십니다. 이 내용은 구원받았다가 박탈당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 초보에 머물러 있는 자들의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4-5절의 내용은 많은 신자들이 원하는 신앙적 요소들이지만 앞서 말했던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타락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라고 합니다. 즉 구원을 무효화해버린 것입니다. 자기의를 만든 것입니다. 땅이 비를 흡수하여 합당한 채소를 내야 하는데 가시와 엉겅퀴를 낸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온갖 능력을 보이고 역사를 했는데 주님께서 모른다고 한 자들인 것입니다.
반면에 9-12절에는 신자들이 가지고 있어야할, 장성한 자로서 완전한 데 나아간 자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들은 내가 만들거나, 노력하여 얻어내는 것들이 아닙니다. 이미 너희 안에 더 좋은 것 즉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받는 것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일방적인 약속에 의해 거역한 자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아브라함의 예로 설명합니다. 신자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기업은 하나님께서 보증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실 때 맹세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맹세할 더 큰 존재가 없으므로 스스로 맹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을 오래 참고 기다림으로 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인하여 믿는 자들에게 소망이 되고 안위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는 바로 약속과 맹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기에 굳이 맹세하실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약속에 대한 보증을 위해 스스로 맹세하신 것입니다. 분명하게, 그리고 철처하게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표명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 약속과 맹세를 통하여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는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가 큰 안위를 주고 있습니까? 19절에는 영혼의 닻 같다고 합니다. 평안하고 든든하다는 말입니다. 정말 그러한 마음이 드십니까? 이것만이 현 시대를 사는 신자들이 가져야할 고백이며 내용입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앞서 들어가신 휘장 안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피난처는 세상이 아닌 바로 휘장 안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들어갈 수 있게 된 곳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곳, 은혜가 베풀어진 곳입니다. 오늘도 평안함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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