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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2019년 6월 25일

갈라디아서 2장



*말씀읽기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말씀묵상

2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가진 복음의 내용이 결코 사도들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간 것도 누구의 요청이 아닌 계시를 따라서 간 것이며,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자신에게 역사하사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증명을 하는 이유는 1장에서도 말했듯이 자신의 증거한 복음이 자신의 말이나 남의 말이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확실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바울이 독불장군식의 행보를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순전함 때문입니다. 계속되는 율법으로 인한 공격이 복음을 흐리게 하고 4절의 내용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유를 빼앗고 율법의 종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얻게 된 자유가 여전히 율법으로 인해 부자연스럽게 느끼게 함을 보게 됩니다. 복음을 깨닫기 이전의 삶이 여전히 자신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은 구원받은 신자들에게서도 늘 있는 모습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살고 있는 현장이 세상 속이기에 하나님 나라의 기준과 원리가 멀리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혼란이 결국은 주변의 상황과 관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3절을 보면 바울이 데리고 갔던 디도가 할례를 받지 않았는데 왜 무할례자와 교제하며 함께 다니는가 하는 비난을 받았던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자유함을 얻게 되었음에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환경에 의해 여전히 불편함(종됨)이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지 못하자 추도예배라는 것으로 타협한 상황처럼 포기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11절 이후에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했던 사건이 나옵니다. 이러한 난처한 상황에 베드로조차도 적응하지 못했던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다가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자 이들이 두려워 그 자리를 떠나버린 것입니다. 이들과 함께 식사함이 복음적으로 당연한 것인데 도망함으로 자신들의 모습이 위선적이었음을 보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렇다면 어떻게 이방인들을 복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하고 책망한 것입니다. 복음으로 살 것인가, 율법적으로 살 것인가? 답은 너무도 당연한데 실제 삶에서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지금 복음과 율법의 대조를 말하는 것이지만 신자의 삶에 있어서 자기의가 얼마나 포기되지 않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내가 뭔가를 하면 그것의 가치를 생각하며 내가 얻을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신앙의 행위들이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것을 하면 나에게 뭔가 일어날 것처럼 생각합니다. 없다고 하면 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느낍니다. 모두가 자신을 위해 해 온 것들 뿐이기에 이러한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22절은 우리가 찬양하며 외우는 구절입니다. 내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내가 사는 것도 그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나는 없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일입니다. 율법은 나를 위한 것이며 내가 주인인 삶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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