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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4장

2019년 6월 27일

갈라디아서 4장



*말씀읽기

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말씀묵상

4장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율법 아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유업을 이을 아들이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는 것과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을 했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시고 율법에 종노릇하는 자들을 속량하여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율법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 유업을 이을 자가 되었음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천박한 초등학문(율법)으로 돌아가 다시 그들의 종노릇을 할 수 있느냐고 책망합니다. 그러면서 바울 자신이 처음에 복음을 전할 때를 상기합니다. 비록 병이 있어서 약한 상태였지만 그것을 개의치 않고 나를 천사와 예수님같이 영접하였다고 합니다. 즉 그렇게 복음에 대해 기뻐하며 감사하던 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복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한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복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자녀됨이 어떤 내용이며 자리이며 은혜인지를 깨닫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율법적인 삶이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삶에 옳고 그름이 이미 몸에 배어 있습니다. 바뀌면 큰일이 나는 줄 압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 기준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것입니다. 배어 있는 것을 흔드는 것입니다. 뿌리를 뽑는 것입니다. 힘들고 아프고 때로는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달라진 것임을 경험해야 합니다.

종노릇하던 자리에서 아들이 되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사상의 기준에 의해 사는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버지를 알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아신바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완전하게 달라진 자들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리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에 종노릇하며 세상 신을 쫓던 자리에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기준으로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어떤 노력이나 자격으로 얻은 것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신자의 가치와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다 주어진 것들입니다. 은혜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만들어가려고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율법으로 계속 뭔가를 하려고 했던 초기 유대교 신자들처럼 현대의 세상적 신자들도 세상의 기준과 가치로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율법의 가치와 기준이 지금의 세상적 가치와 기준과는 다른 것이지만 그것으로 만들어 내려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 중심과 만족, 성취감, 자랑, 이로 말미암은 십자가 은혜의 구원을 약화 시키는 것들입니다. 의도적이진 않더라도 상황과 본성에 의해 따라가게 됩니다. 신자의 복은 은혜로 받은 구원에 있습니다. 오늘도 은혜를 따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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