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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1편

2020년 10월 17일

시편 131편



[말씀읽기]

1 <다윗의 시,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2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젱뗀 아이가 아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

3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말씀묵상]

131편은 아주 짧은 시이지만 놀라운 고백과 내용이 있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며 마음의 교만, 눈의 높음, 위대한 일을 버리겠다고 합니다. 자신의 삶에서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교만한 마음을 갖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하심에 삶을 맡기겠다는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이라는 말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이해하지 못하는, 헤아리지 못하는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고백은 욥이 주님을 만난 후에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할 때 한 내용입니다. 욥42:3절에 보면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고 했는데 여기서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이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역사를 가리킵니다.

신자들이 바로 이러한 고백을 해야 합니다. 애써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어떤가요? 정말 나의 삶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맡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내가 나의 삶의 주관자로 내 삶을 만들어가고 있습니까? 세상은 어찌하던지 자신의 삶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도태될 뿐만 아니라 사람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생존을 위해 힘쓰는 자들이 아닙니다. 생존이 현실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이지만 목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제 시인은 아주 중요한 고백을 합니다. 자신이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다고 합니다.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젖을 뗀 아이라는 말은 그가 어머니의 주는 것에 달려있는 자가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먹이심에 의존하는 자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다는 말은 이렇게 어머니로부터 공급이 떨어진 존재이지만 그의 상태와 모습은 여전히 고요함과 평온함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그는 이제 주님만을 신뢰하며 주님 안에 있는 것 자체로 만족하며 사는 존재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1절에서 주님만을 신뢰하며 살기로 한 자신에 대해 젖을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고요함과 평온함으로 있는 모습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목적하는 것들을 다 내려 놓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함께 하심으로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리며 살게 된 모습을 말합니다. 중요한 고백이며 세상에 여전히 미련을 가지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내용입니다. 아직도 젖을 떼지 못하고 있는 삶은 아닌지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시인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라라는 당부를 합니다. 공동체적 고백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주님만을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함께 나아가야할 모습입니다. 팬데믹으로 인해 함께 하는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함께 서로를 위해 기도함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훈련을 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도 모두가 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는 시애틀 주언약교회 성도들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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